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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482 죽도(竹島)와 정여립(鄭汝立) 관리자 07/13 11:46:40 705

진안 읍내에서 무주 쪽으로 약 8km정도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상전면 산정마을에 이르고 이곳에서 다시 금강 사류를 따라 4 km쯤 거슬러 올라가면 높이 3백여m에 이르는 깍아지른듯한 절벽이 맑은 물에 3면이 둘리어 마치 섬처럼 떠 있는 절경이 나오는데 이곳이 죽도이다.

이 죽도는 남쪽 장수방면에서 흘러오는 장수천과 동쪽 안성면의 덕유산에서 발원한 구량천이, 파(巴)자 형으로 굽이쳐 합류되는 중간에 우뚝솟아 있는 독산으로 강 기슭으로 부터의 높이는 약 백m에 이른다. 험준한 암산이 강상에 솟아있는 모양은 참으로 절경이며, 푸른 송백松栢)과 하얀 모래사장의 조화가,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현출하는 듯하다.

죽도는 자연경관이 뛰어났을뿐 아니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해전에 모반을 꾀하였던 정여립이 자절(自絶)한 곳으로역사의 숨결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

정여립은 첨정 희증(希曾)의 아들로서, 대대로 전주 남문밖에 살았다.희증은 여립을 낳을때 고려명종때 반란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의 꿈을 꾸었는데 그를 낳을때 또다시 중부를 꿈꾸었다 한다.친구들은 득남을 축하하였지만 희증은 남몰래 기꺼이 여기질 않았다. 1570년(선조 3년)에 문과에 오르고,수찬의 벼슬을 얻었으나 얼마후 이를 버리고 고향인 전주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이 명성은 조 , 야간에 떨쳤고 도내의 사인(士人)들이 그의 기품을 대하고자 출입이 비넌하였다.

여립은 전주, 금강등지의 무사와 공, 사간의 천민들과 상하를 통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다.겉으로는 귀천을 초월한 친목단체였지만 매월 15일에는 한자리에 회합하여 활쏘기등 무예를 배웠다.

이조 중기부터 이른바 정감록(鄭鑑錄)이란 참서(讖書)가 횡행하여 백성들의 머리속에 전번되어 갔다. 그에 의하면 계룡산 계태사의 '세터'는 정씨가 등극할 도읍지라는 것이다. 100여년전 부터는 '목자망(木字亡)존읍흥(尊邑興)' 이란 요언(妖言)이 생겨 이왕가(李王家)가 망하고 정씨가 등극한다는 파자인것으로 믿어져 내려왔다.

정여립은 이러한 비결, 요언들을 교모히 이용하여 선전하며 자신이 이씨을 대신하여 등극할 정씨임을 은근히 자처 하였다. 그는 이러한 망상이 차츰 굳어져가자 곧 실현을 꿈꾸게 되었다.그는 안악사람 변숭복(邊崇福)과 운봉출신의 중 의연등과 결탁하여 호남과 곤서(황해도)에서 남북으로 동시에 거사하여 서울을 협공하고, 왕을 축출하려는 '쿠데타'를 꾀하였다.

그러나 1589년(선조 22년) 10월 황해도에서 음모가 탄로되어 버리자 용맹이 뛰어난 변숭복은, 안변으로부터 탈피하여 4일만에 여립에게 위급한 곡절을 알렸다.여립이 변과 함께 아들 옥남을 데리고 피신한 곳이 바로 죽도였다. 서울에서 포리(捕吏)들이 내려왔으나 여립은 이미 집에 없었다. 진안 현감 민인백(閔仁伯)은 촌인의 밀고를 받고 군사를 풍러 죽도를 기습하였다. 이들은 강건너에서 보고 사로 잡으려 했으나 숭복은 '우리가 사로 잡히게 되어 심한고문을 받고 동지들의 이름을 고하는 날이면 많은 사람에게 화가 미칠것이요, 그렇다고 결국은 죽음을 피하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여기서 잡히기 전에 함께 죽되, 내목부터 베라' 하고 여립에게 목을 내밀었다. 여립은 둘도 없는 동지와 아들 옥남을 베고, 그 칼을 땅에 꽂은 다음 칼끝에 업드려 자살하니 칼끝이 배를 뚫고 등위에 솟아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옥남은 죽지 않고 붙들려 서울로 압송되어 죽음알 당하였다. 그때 17세였다. 그는 낳아서 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눈동자가 이중으로 빛나고, 양견에 일월의 모양을 한 흔적이 있었다 한다. 여립이 '쿠데타'를 꾀한것은 정감록 비 결과 이 옥남의 신귀한 몰골에서 비롯한 것으로 사람들은 믿었다. 

정여립의 이 쿠데타 음모사건은 그후 동인(東人)에 대한 박해로 이어지고 끝내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 났으며 이후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인의 등용길이 막힌 원인중의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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