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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474 동학혁명(東學革命)과 진안(鎭安) 관리자 07/13 11:45:31 866

1894년(高宗 31년) 제폭구민(際暴球民)의 기치를 높이 들고 봉기했던 동학혁명은 안으로는 봉건체제에 대항하고 밖으로는 척외(斥外)사상을 일깨움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갑오개혁이라는 내정(內政)의 개혁과 청일전쟁을 유발한 근세 한국의 큰 사건이었다.

이 동학혁명의 발자취는 우리 고장 진안에도 남아 있으니 현재의 진안국민학교 뒷산과 성묘산이 그 곳이다.

1892년(高宗 29년) 고부군에 부임해온 군수 조병갑(趙秉甲)은 농민들을 동원하여 만석보(萬石洑)를 쌓게 하고 그들로부터 수리세(水利稅)를 거두어 사복을 채웠다.

군민들은 이의 부당함을 들어 여러차례 수세감면을 진정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학집주 전봉준(全琫準)은 1894년 2월 10일 1천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궐기하였다.

먼저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군아를 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稅穀)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정에서 이를 보고받고 탄압하니 전봉준은 합세하는 농민군을 이끌고 계속하여 백산, 금구, 부안, 흥덕, 고창, 무장을 점령해 나갔는데 그사이 농민군의 숫자는 1만여명으로 늘어났다. 4월에는 다시 영광, 함평, 장성등을 점령하여 경군(京軍) 을 격파하고 전주로 들어와 점령하니 4월 27일이었다.

그러나 5월 7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어 농민군을 전주에서 철수 시키고 전라도 53군현에 집강소를 설치 하였다.

전봉준은 또다시 재기를 노려 북벌군을 일으켜 관군과 일본군을 격퇴하여 공주 감영을 포위 하였다.

11월에 접어들자 동학군은 전주성에서 곰티재까지 후퇴를 하여 5 ~10일간 격전을 하였으나, 결국 무기 부족으로 진안까지 패퇴(敗退) 하였다.

이때 동학군의 세력이 약해진 것은 관군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동학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 일군(日軍)을 처해 들여와 관군과 합세하였기 때문이었다.

진안 동학군은 전주, 부안, 김제 동학군을 돕기 위하여 전주에서 합세 하였는데 김제 백산으로 농민군을 거느리고 온 진안동학군의 군장(軍長)급으로 이사명(李士明),전화삼(全和三),김택선(金澤善)등이 있었다. 

이보다 앞서 9월 전봉준이 재기하여 진안 동학접주인 문계팔(文季八), 김영동(金永東), 이종태(李宗泰)등의 힘을 얻을 수 있었으나 이처럼 역부족으로 진안에서 대치하게 된 것이다.

동학군은 점차 세력이 약해져 현재 진안 초등학교 뒷산과 성묘산에 포진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희생자만 나올뿐이었다.

12월 12일 시라끼 대위가 거느리는 일군지대(日軍支隊)가 통과하는 것을 발견한 동학 농민군 약600명이 진안현 서북산상에서 공격을 가하였다.

이 때 일본군이 쏜 탄약 소비량은 192발 이었으며 농민군은 18명이 전사하였다.

최후의 일각까지 싸웠으나 동학군은 이곳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이때 동학군의 주동자는 자살하였으며 약 300여명의 동학군은 체포되어 진안 초등학교 뒷산 기슭의 밤 나무 아래에서 효수형을 당하고 일부는 군하리 제방가 고목나무에서 역시 효수형으로 죽었다.

진안의 전세일(全世溢)은 본명이 은갑(銀甲)이었는데 동학군에 가담하여 싸우다 잡혀 효수형으로 죽어 그의 가족이 목없는 시체를 거두어 진안읍 군상리 산 113번지에 안장 하였다.

진안출신 농민도 50여명은 도망치다가 관군에게 쫓기는 몸으로 집에 있다가 관군이 오면 집뒤로 도망쳤는데 뒷 문이 없는 집은 그때부터 제값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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