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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327 주인 살린 충비(忠婢) 이난향(李蘭香) 관리자 07/13 11:08:38 646

진안에서 무주쪽으로 8km 남짓 가노라면 양지바른 산 기슭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상전면 수동리 산정
이라는 마을에 이른다.이 마을은 대대로 홍씨(洪氏)들이 토반을 이루어 사이좋게 살았으며 노비(奴婢)
들까지도 주인에 충직하여 화기가 감도는 마을이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화롭던 이 마을에도 왜군이 밀어닥쳐 노략질을 일삼으면서
가재도구를 불태우는등 만행을 저질렀다. 서울에서 난을 피해 이곳에 내려와 있던 홍참판도 예외일수 
없었다.
왜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재너머 깊은 산중에까지 피신해 있던 홍참판 일가는 서둘러 피하는
바람에 식량이나 먹을물마저도 준비를 못해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할 처지였다.주인식구들의 어려움을
보다 못한 사비 난향은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주인을 위해 식량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야음을
틈타 폐허가 된 마을에 내려왔다.
그러나 홍참판집은 왜군들의 방화로 이미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어디서도 쌀한톨 구할 수 없어 쩔쩔
매고 있는데 갑자기 마을을 순찰하던 왜군들이 나타나 꼼짝없이 붙들리고 말았다. 나이어린 계집종 
난향은 왜군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았으나 겁에 질려서 말문을 제대로 열지도 못하였다.

"네 주인이 어디 있느냐?"
"네 주인이 뭐하는 놈이냐?"
"양반이지?"
"왜 대답을 안해"
"몰라요, 정말이예요, 주인이 있는 곳도 모르고요"
" 하하, 이거 안돠겠구나?"
"어러, 이거 어찌한다?"
"뭘, 어째, 지금까지 우리가 해 왔듯이 고문을 해서라도 기어코 그 쥔놈을 찾아 내야지"

왜군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한 난향은 끝내 주인이 있는 곳을 대지 않고 그네들에게 욕을 당하기전에 
혀를 깨물어 자결을 하고 말았다. 난리가 끝나고 평온을 되찾은 후에 선조 임금은 1604년에 명정(命旌)
의 은총을 내렸으며 후세 사람들은 이 난향의 갸륵한 넋을 위로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당시 홍참판은 홍습(洪濕) 호는 성곡(聲谷)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인데 일찌기 그의부친과 큰아버지는 
난세를 피하여 강자와 산자가 들어있는 지명을 찾아든것이 큰집은 마령.강정(江亭),작은집은 산정
(山亭)을 찾았다 한다.

홍참판은 산정리 산너머 서당골에 서당을 차리고 인근의 후진 교육에 전심전력을 다하였는데 지금도 
그곳에는 논과 집터가 있으며 기와장도 흩어져 있다. 또한 홍참판의 장조카되는 세경(世敬)은 해주 
판관을 제수 받았는데 해주에 부임하자마자 난향의 일을 생각하여 집에 있는 종을 모두 풀어 주었다. 

서당골에 있는 장군석 비석등이 해주에서 나왔다고 하여 해석(海石)이라고 하는데 종을 해방시킨 그의 
덕을 기리어 황해도의 종들이 경기도까지 경기도의 종들이 충청도까지 ...... 이런식으로 군계를 넘겨
산정리 서당골가지 운반한 보은의 돌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t 홍참판 일가는 산정리 동묘 밑에 굴이 있었는데 그 굴을 통하여 서당동으로 피신하였다.
그굴이 지금도 어디엔가 있다는것이며 이굴에서 불을 때면 대항목이란 곳에 연기가난다는 전설이 있다.

산정리에는 왜병이 진을 쳤다고 하는 「진터」라는 지명이 있고 그때 심었다는 은행나무는 당산목으로 
왼쪽으로 꼰 새끼를 나무에 둘러매고 은행나무 밑에 있는 샘물을 떠놓고 득남을 빌었으며 진안, 장수,
무주물이 합수치는 산정마을앞의 삼수(三水)를 물동이에 길어가 옥동자를 얻은 부인네들이 많다고한다.

난향의 정려(旌閭)는 그 굴이 있었다는 동묘 벼랑밑 길가에 있었는데 1971년 현위치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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