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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311 오매(寤寐)골 충절 김만서(金晩緖) 관리자 07/13 11:05:19 500

온갖새 / 깃든 이밤 / 두견만이 / 슬피우니
한 맺힌 / 저 설움을 / 그 뉘가 / 알아주리
남 가신 / 그리운 정을 / 눈물로 / 달래노라

이 시는 어린 임금 단종이 재위 3년만에 상왕으로 물러났다가 그 이듬해인 1457년(세조 2년)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를 듣고 망극한 심정을 글로 써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에게 주었다는 김만서 선생의 글이다.

선생의 자는 자술(子述)이오 호는 오매당(寤寐堂)이며 본관은 사천(泗川)이다.평장사민의공(平章事敏懿公) 사 신 의 아들로 서울 화화방에서 태어나 나이 16세에 명경과에 응시하여 답안을 올리니 그 해석이 매우 정미(精微)할 뿐만아니라 옛 사람들이 미처 밝히지못한 점을 들어 내놓아 시관(試官)을 놀라게 하였다.

1428년 (세종 2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때에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진법(陣法)을 마련하여 올리었고 1453년 (단종 원년)에는 경상관찰사를 제수받았느데 때에 황보인등이 한명회일파에 의해 화를 입게 되자 선생은 그 무죄함을 익히 알고 이를 슬퍼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내려와 3년동안이나 우울한 나날을 보내었다.

1456년 (세조원년) 매죽헌 성삼문 등 많은 선비들이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는 소위 사육신 사건이 일어남에 선생은 가슴 아픈 마을을 홀로 달래며 「신하가 되어 충절을 다하고 몸을 바쳐 인(仁)을 이루니 어찌 다시 유감이 있으리오?」하고 드디어 진안북쪽의 궁벽(窮僻)한 산골에 묻혀 살아가니 때에 당시의 도백 이석형(道伯李石亨)이 자나깨나 옛 임금과의 의리를 잊지 않는다는 뜻을 취하여 「오매당(寤寐堂)」이라는 제호를 비밀리에 내리니 선생은 「죽지도 못하고 그대로 남아 어쩔 수 없이 사는데 어찌 편안히 옥명屋名)을 둘것이랴?」하였다.
이에감복한 이석형은「오매당을 선생이 사시는 동네이름으로 삼으시오」라고 굳이 부탁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냈다.

순임금 / 그리던 / 소상강 / 대나무나
진시황 / 쉬었다던 / 태산의 / 소나무는
슬프고 / 영화로운 / 차이는 / 있었다오
차라리 / 그렇거든 / 차고 더움을 / 아우르소서

이 시에 선생께서는 즉시 시사(時事)에 환멸을 느끼고 산간에 파묻혀 버린 자신의 괴로운 심정과 안타까이 가신 옛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들어 다음과 같이 화답하여 노래하였다.

구름보며 / 천년학은 / 소나무에 / 들고
의를 위해 / 이 몸은 / 산수간에 / 있다오
저토록 / 두견새는 / 슬피 / 울어도
그리운 / 옛 시절이 / 돌아올리 / 없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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