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명소

진안의 관광명소는 다른 명소와는 다른 매력이 곳곳이 숨어있습니다
진안만의 특별한 명소를 소개합니다

진안만의 특별한전통/문화

스토리텔링
고향을 빛낸 인물

::전통/문화::스토리텔링 ::고향을 빛낸 인물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310 오 빈(吳玭)의 충절(忠節) 관리자 07/13 11:05:01 406

선생은 함양 오씨(咸陽吳氏)로 호는 성산(聖山)이며 벼슬은 홍문정자(弘文正字)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지냈다.임진왜란때 고경명과 더불어 창의를 일의켰으나 금산에서 불리하자 의병을 제규합하여 고종후,김천일 등과 진주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니 마령면 평지리에 있다.

순절 충신 장사랑 오빈의 자는 영보(榮甫)로 영의정 함양부원군 오광휘의 11세손이며 중서령 이조판서의 증손으로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재능이 뛰어나 문학에 능통하고 행실과 품행이 단정하여 어버이를 효도로 봉양하였다. 매사에 법도있게 행동했으며 항상 대의를 연구하였고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4일 일본의 풍신 수길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전후 2차례 7년간에 걸친 임진 정유왜란을 겪게 되었다. 이때 장사랑 오빈은 동생 형(珩)을 앞에 불러 「국운이 이제 풍전 등화이니 어찌 이를 대장부가 보고만 있겠느냐 나는 왜적을 막기 위해 기꺼이 의병에 참여할 것이니 너는 고향에서 부모모시고 부모의 상을 당하면 예도(禮道)에 맞게 시묘할것이며 부모님모시기를 하늘같이 하라」부탁하고 고경명과 더불어 창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금산에 진을 치고 있던 왜병에게 패전하여 가는 길이 막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봄 초전에 패전하기만 하던 관군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명군(明軍)의 힘을 얻어 전세는 호전되었고 왜병은병력을 경상도 진주성에 집결시켰다.이때 진주성을 포위한 왜군의 병력은 10만이 넘었으며 성안의 아군의 군관만 합하여 6만이었다. 이때 김천일, 최경희, 황 진 등과 함께 유명한 진주성 싸움은 시작되었다. 6월 22일 새벽 왜의 대군이 몰려왔으나 군관민이 잘싸워 물리쳤다. 6월 23일 수차 공격 하여왔으나 격퇴시켰고 6월 24일 왜군은 동문을 집중 공격하였다. 6월 25일 적(賊)은 동문밖에 토성을 쌓고 조총 (鳥銃)을 난사하니 선봉장이던 황 진 장군은 병사를 독려하여 성내에 더높게 토성을 쌓아 왜군을 공격 하여 물리치기를 다섯차례나 하였다. 26일에는 승산이 없음을 안 왜는「이미 명(明)이 항복을 했는데 너희들은 항복을 하지않고 감히 버티느냐」하며 항복을 재촉하자 「우리는 끝까지 싸울뿐 어찌 네따위 섬나라 도적에게 항복한단 말이냐」하고 호령하였다. 27일 적은 5층 토성을 쌓고 맹공격하고 4륜철갑차를 만들어 공격하여 왔다. 28일 야음을 타 성을 무너뜨리고 성내에 잠입하였으나 김해부사 이종인과 황 진장군 등이 혈전을 벌여 왜를 격퇴시켰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성밑에 죽은듯이 엎드려 있던 왜병의 총탄에 맞아 황 진 장군이 전사하게 되고 7일간에 걸쳐 패한적이 없던 아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진주성은 함락되니 오 빈은 고종후, 김천일 등 22명과 함께 1593년 6월 29일 촉석루에서 북향(北向) 사배(四拜)한 후 투신(投身) 순사
(殉死)하였다. 

조정에서 그해 8월 15일 이들의 합동위령제를 지내는 한편 오빈에게 장사랑이란 증직을 내리었다. 

진안군청 QR코드 https://tour.jinan.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