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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여류문장 삼의당 김씨(三宜堂 金氏) 관리자 07/13 11:04:45 548

조선조 영조때 뛰어난 시풍과 탁월한 문장으로 근세 한국 여류문학의 최고봉을 이룬 삼의당 김씨는 1776년 (영조 44년) 남원의 서봉방에서 태어났다. 1786년(정조 10년) 같은 나이에 생일까지 똑같은 한동네 사람 하립과 결혼하여 그들의 나이 서른 세살되던 1801년 (순조 1년) 마령 방화리로 이사와 여생을 마쳤다.

삼의당은 나이 일곱살이 되면서부터 글방을 기웃거리며 귀동냥으로 글을 익혔으며 철이 들면서 명심보감을 비롯하여 소학을 통달했고 그것을 응용하여 그럴싸한 문장을 만들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한다.

남녀 칠세부동석이라는 전통적 유교인습에 얽매어 있어 감히 글공부를 할 수 없었던 여자의 몸으로 이처럼 어려서부터 글과 더불어 자라난 삼의당은 용모 또한 빼어나서 그를 사모하는 총각들의 애를 태우게하기도 했다.

삼의당의 남편 하 립 또한 김부인에 못지않은 문장가이자 사내 대장부였으며 무엇보다 그들이 한 마을에 살면서 정이 들고 문장을 잘 하는 점이 이심전심으로 그들을 결합하게 햇따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서로 만나다 보니
달나라의 선녀이구려
전생의 인연으로
분명 이밤 가져온 걸
속세의 중매란 분분할 뿐
우린 천정의 배필이여 >

결혼 첫날밤에 남편 립이 이러한 시를 아내에게 주었고 삼의당은 다음과 같이 화답시를 지었다.

< 신랑과 선녀
한날 한시 한마을에 나서
다시 화촉의 인연을 맞았거늘
어찌 다
이밤의 기쁨이 
한낱 우연이리오 >

삼의당은 시와 문장에 뛰어난 여류이면서도 한 아내로서도 손색이 없는 후덕한 아내의 도리를 다한 여인이었다.

가난한 남편의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과 또 남편으로 하여금 보다 훌륭히 부모네들을 봉양케 하기 위해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도록 돕는 피나는 노력은 가녀린 한 여심의 비상한 정성과 효심이 스민 것이었다. 그러나 비범한 문재를 지닌 립은 어쩐 일인지 향시에는 자주 뽑히면서도 회시에는 번번히 실패하기가 일수였고 그럴때마다 아내인 삼의당은 남편을 위로하며 마이산에 들어가 과거 공부 하기를 권하였고 노자를 마련하여 서울의 풍물을 관광케 하여 견문을 넓히도록 온갖 정성을 다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립은 관운이 없었던 탓인지 아내의 애절한 기대에의 보람도 없이 끝내 과거에 급제할 수 가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의당내외가 진안 마령으로 삶의터전을 옮긴것은 그들의 중년 이후로 모든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삼의당 김부인 유고에 의하면 「그들 내외는 선영을 수호하기 위해 중년에 이르러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주를 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그들은 선영을 위할 줄 아는 가도에 따름도 있겠지만 산수좋고 인심좋은 진안땅을 밟는데 대한 묘미와 풍류가 있었을 것은 미루어 짐작이 가는 이야기다.

더욱 마령에서 진안을 꿰뚫는 도상에 하늘을 뚫듯 쭝긋 선 말의 귀를 연상하는 마이산의 위용과 칼날을 세워놓은 듯한 숫산, 그리고 거기에 비해 어딘지 단아한 교태를 먹음은 듯한 암산의 영봉은 이들 부부시객들의 더없는 시류를 자아내게 하였을것도 물론이다. 이렇듯 삼의 부부는 시를 읊고 시와 더불어 일생을 해로한 부부였다.그들에게 시와 글이 있음으로써 모든 인생의 열락을 거기에서 찾았으며 어떠한 고난과 난관이 앞을 가렸다해도 그것은 또 그들의 숭고한 예술로 해서 항상 깊은 이해와 아름다운 사랑으로 충만되곤 했던 것이다. 

마령면 방화 마을에는 삼의당 부부가 글을 벗삼아 기거하던 초옥이 기울어진 서까래에 겨우 의지하고 쓸쓸히 서 있으며 그들의 후손인 하씨 일가가 인근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들의 문집으로는 삼의당고가 전하여 오며 이 유고는 1930년 「오상철 교열(校閱) 정희택 편집 정일섭 발행」의 석판본으로 출간되었다

1747년(영조 23년)안서(岸曙) 발행의「이조규수한시선집(李朝閨秀漢詩選集) 금잔디」에 삼의당의 시가 32편 수록되어 있다.

「내 또한 호남의 한 우부(愚婦)라 깊은 안방에서만 자라나 비록 경사를 널리 궁구(窮究)하지는 못했지만 일찌기 언문으로 소학을 해독하고 미루어 문자를 통하여 제가(諸家)의 시서를 대략 보았는데 그렇다고 하여 어찌 짧은 글과 무딘 솜씨를 들어 세상사람들의 나무람을 받으리오. 다만 호정 (戶庭) 안에서 본대로 들은대로 또 지내는 대로를 혹은 말로 혹은 시로 남겨 느낀 정대로 맡겨 써 놓는 것은 내 스스로 뒷날에 좋은 거울과 법도를 삼고져 함에 있다 할지라」

이 글은 삼의당김씨가 남긴 유고150여편중 첫머리에 나오는 자서(自序)의 글이 다음 몇편의 시문을 소개한다.

높은 뜻 / 아니시면 / 어이타 / 남가시리
오늘의 / 이별잔은 / 물에잠긴 / 저 달이나
오실댄 / 낙양구름을 / 부디몰고 / 오소서

천리길 / 달리시고 / 구만리를 / 나시려든
하물며 / 하챦은 몸 / 님 가슴에 / 두시오리
낭군님 / 그 크신 뜻을 / 한사코 / 이루소서

하챦은 / 이 몸두고 / 못잊어 / 하시릿가
입은옷 / 던진일은 / 나라위한 / 큰일이나
책지고 / 떠나신 뜻은 / 더욱 크신 / 일이라오

삼춘의 / 따스한 날 / 즐거이 / 떠나시니
늙으신 / 어버이도 / 장히여겨 / 기쁘시다
기필코 / 금의환향을 / 두손모아 / 비옵니다

사실 세속적인 안일을 포기하고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어려운살림을 혼자꾸려가면서도 항상 낭군의 입신양명만을 손꼽아 비는 생활로 좋은 청춘을 다 보낸 삼의당 김씨이기에 자연 그의 문학적 주제는「은근한 기다림이나 설움」이 아닐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추규사(秋閨詞)>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호올로 / 사창(紗窓)가를 / 함없이 / 거니노니 
어느듯 / 밤도이제 / 깊을대로 / 깊구나
헝클진 / 머리만지며 / 등신(燈心)만 / 적셔보오

저멀리 / 떠나신채 / 기별없는 / 무정한 님
그리운 / 심사(心思)만은 / 어이할 수 / 없구나
열두줄 / 골라잡고서 / 그리운 정 / 띄어보오

수탄(獸炭)을 / 피워보니 / 저다지 / 잘타오
한줄기 / 저 연기가 / 차거움을 / 더하노나
내 홀로 / 지새는 이밤 / 한해처럼 / 길고녀

오동잎에 / 떨어지는 / 처량한 / 저 빗소리 
시름젖은 / 이내맘을 / 더욱더 / 섧게하오
살며시 / 병풍두르고 / 잠을 청해 / 본다오

가을밤 / 깊고 깊어 / 오경에 / 가까운데
잠잃은 / 이내몸이 / 창밖을 / 보옵나니
빈 뜰악 / 온가지마다 / 밝은 달만 / 가득하오

빈 이불 / 부여안고 / 님찾아 / 헤매노니
님께서 / 바란대로 / 웃고들어 / 오시이다
좋아라 / 깜짝반기니 / 허망코나 / 내의 꿈

깊은밤 / 밝은 달만 / 저녁재에 / 가득하고
님그리는 / 이맘을 / 하소할길 / 없는데
그뉘 / 옥피리불며 / 성을너머 / 가는가?

가엾다 / 외로히 / 홀로새는 / 이한밤
그리움이 / 사모쳐 / 이리뒤척 / 저리뒤척
님뵈올 / 단꿈마져도 / 이룰 수 없고녀

공작그린 / 병풍도 / 비취놓은 / 이불도
님없는 / 빈방엔 / 하릴없는 / 물건이라
차가운 / 가을달빛에 / 마음더욱 / 섧으오

덩그러이 / 솟아밝은 / 청천의 / 저달보고
님그리는 / 내 정대로 / 님도 날 / 기리시니
두어라 / 우리 두맘을 / 모두비쳐 /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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