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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308 애국지사 송 필용(宋弼用) 관리자 07/13 11:04:24 456

선생의 자는 윤직(允直) 호는 경헌(敬軒)이요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1904년 6월 22일 주천면 신양리에서 출생하였으니 시대적으로 매우 뒤숭숭한 때였다. 이른바 을사보호 조약이란 허울좋은 이름아래 우리나라의 외교권과 주권이 일보느이 손아귀에 들어가는 불운이 감돌고 있었다.

나이 16살때인 1919년 사립화동학교 (華東學校)에 다니던 선생은 3.1독립 만세운동이 진안땅에 까지 불타오르자 학생들과 같이 선두에 서서「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횃불을 들고 학교앞의 논에 모여서 독립 만세를 외치던 선생은 결국 왜경에 잡혀 옥살이까지 하였다. 열여섯살의 어린 나이에도 식민지의 설움에 울분을 터뜨리고 왜놈들에게 경종을 울려준 것이다.

선생은 1923년 3월 1일에는 3.1독립만세의 구국일념을 회상하며 제천봉에 황단을 만들어 봄, 가을 두 차례 향화를 올려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배일사상을 함양시켰다. 황단은 임진왜란 이후 이곳 주천에피난 온 총계 정지승 선생이 제천하던 유서깊은 곳이었다.

「나라가 없이는 개인이 존재할 수 없다. 나보다 사회를 생각하라」는 것이 황단 설단의 의의였고 그를 찾는 제자들에게 불어 넣어준 배일사상이요 국민정신교육이었다.
일찍부터 대불리에 화양도원(華陽道院)을 열어 후진교육에 열성을 바치던 수당 이덕응 선생으로 부터 애국심과 학문을 수학해 온 선생은 이후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20여년을 헌신
하였다. 선생은 스승인 수당선생이 돌아가실 때가지 대불리의 황단에서의 제향참석은 말할것도 없고, 선생의 기일에는 자기가 죽기전가지 꼭 참석하는 등 스승의 존경함도 남달랐으며 그를 찾는 제자들에게 
보수를 받는 일이 없었는데 선생의 문하는 500여명에 달하였다. 그러면서도 잠시 금산에 은거하고 있던 의병장 근제 이송과 긴밀히 연락하며 교분을 가졌으며 향리에서의 교우관계도 구국의지(救國意志)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과는 대면을 하지 않았다.

선생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광복과 더불어 국민운동에 앞장서 대한민국의 포석을다지는 한편 1946년에는 의열단을 설치하고 4 열사 (송명선, 최익현, 민영환, 이준)와 4 의사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불타는 애국정신을 기려 매년 8월 15일 향화를 잊지 않았다.

선생의 나라를 위한 애국심은 경술합방으로 나라를 잃은 때부터 써 왔을 것으로 보이는 수상록 제천지(霽天誌)에 잘 나타나 있다.

책장을 넘기면 먼저 대한 절의록 (大韓節義錄)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조병세, 민영환, 송병선, 최익현, 이준 ...... 등의 대쪽같은 이름과 그들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여 자신의 항일 구국의 마음을
가다듬었고, 46년에 쓴「깨어라 민족 통일과 독립완수는 각 가정에서 부터」에서는 혼란한 사회상을 개탄하여 민족의 단결을 염원하였으며 「세계 평화는 약소국에 있지 않다」에서는 미국과 소련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아니고 한국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원하면서 조국의분단을 우려하기도 하였으며,「태극기」와 1947년에 쓴 「정해년의 희망」편에서도 민주 대한민국의 출범을 염원하는 선생의 뜻이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의 염려하던바와 같이 조국이 분단되어 1950년6.25사변이 발발하자 공산당에게 제일 먼저 끌려가고 말았다. 「자유 민주국가를 이땅위에 건설하는 것이 나의 뜻」이라는 청죽같은 애국심으로 공산당에
굽히지 않다가 1951년 5월 28일 구암리에서 학살당하고 말았으니 선생의 나이 47세였다.

벗나무 몽둥이로 분주소 바닥이 피로 물들도록 맞으면서도 굽히지 않는 선생의 뜻은 주천면 대한의 백비(大韓義 魄碑)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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