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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307 병자호란때 창의한 정 동협(鄭東俠) 관리자 07/13 11:04:03 402

자는 신부(藎夫), 호는 모재(慕齎)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다.호군(護軍) 건(健)의 아들이며 문강공 화담(文康公 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외증손이다. 어려서부터 효도하여 나이 열살에 이르자 반드시 일찍 일어나 사당을 참배하고 나서야 글을 읽는등 행실이 비범하였으며 열두살에 아버지를 여임에 삼년을 하루같이 시묘의 정성을 다하였다. 홀어머니를 섬김에 성의를 다하여 항상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행할 도리를 마땅히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글을 배우라 하였으니 인륜을 행하여 부모를영화롭게 한다함은 옛 성인의 가르침이라」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여러 이웃 사람들의 한결같은 추천으로 참봉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615년 (광해군 7년)에 어머니의 병이 위중함에 선생은 하늘에 눈물로 기도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바치는등 갖은 효성으로 어머니의 병을 다시 회생(回生)시켰다.

1636년 (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파천(播遷)하는 위급한 때에 이르자 선생의 족숙(族叔)되는 충청관찰사 정세규에게 편지하기를 「임금님께오서 위급한 처지에 계시니 신민된 의리로 마땅히 이 어려움을 해결해야 할것이오나 저는 이미 팔십되시는 늙으신 어머님이 병중에 계옵신지라 어찌 할 수 없어 큰 아이에게 집안일을 부탁하고 둘째아이와 가동 수십을 이끌고 족숙의 진에 이를 것이옵니다」하고 마이산 밑 지천리(현재 은천리)로 집을 옮기고 편지의 내용과 같이 창의하였다. 

전응철,전응종형제 및 신성식과 죽기를 맹세하고 군비와 군량을 모으고 전략을 모의하게되니 향병과일반 백성으로서 의병에 가담하는 사람의 수가 수백명이었다.선생은 이들을 이끌고 여산에까지 가서마침내 과천까지 북상하였는데 그 곳에 이르러 이미 청나라와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나라를 위해 순국하지 못함을 분하게 여기며 돌아오고 말았다. 당시 관찰사 이시방이 예빈시정, 사복시정으로 추천했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10년을 하루같이 집안에서 홀어머니 봉야에 정성을 다하였다. 

한때에 적병이 이 지방에까지 이르러 온갖 민폐를 끼쳤으나 선생의 동네만은 침범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는 선생의 효성에 힘입어 한 동네가 병화(兵禍)를 모면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도 전과 다름없이 죽을 먹어가며 한서(寒暑)를 무릅쓰고 시묘의 정성을 다하여충효전가의 모범을 보였으니 이는 외증조인 화담 서경덕선생의 높으신 인격에 감화를 받아 어떠한 명리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인륜실천에 힘을 써야 된다는 선비정신에 투철했던 결과라 할것이다.

특히 선생은 성리에 밝아 많은 유고를 남긴바 오늘날까지 전해오며 자세한 사적은 절의록(節義錄)에기록되어 있고 청주 한 기유가 쓴 행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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