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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306 근세(近世) 유학자 임 영(林 泳) 관리자 07/13 11:03:46 383

공의 자는 덕함(德涵)이요 호는 창계(滄溪)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상주목사 증이조참의 서(尙州牧使 贈吏曹參議 瑞)의 손자요 참지중추부사 증이조참판 일요(參知中樞府事 贈吏曹參判 一儒)의 아들이다.

1649년(인조7년)에 나주의 회진(會津)에서 태어났는데, 선대에 참의공(參議公)께서 금산(錦山) 원님으로계실때 용담에 별장을 두고 만화정(萬花亭)을 와은촌(臥隱村) 강 언덕에 건축하여 스스로 화산(花山)에 사는 사람이라 한 옛 행적이 있으므로 선생이 용담현(龍潭縣) 조림리(照林里)로 이사를 온 것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무릇 아이들중에서 뛰어나 세살때에 할머니 께서 입으로 천자문을 가르쳤더니그 음(音)과 뜻을 다 깨우쳤다. 일찌기 등잔밑에서 놀면서도 그 밝은 곳을 가리켜 여기는 양(陽)이라 하고 그 어두운곳을 가리켜 음(陰)이라 하였다 하니 이는 옛날 중국의 소강절 선생이 대그림자(竹影)로 음양을구별했다는 고사와 합치되는 것이다.
선생이 처음으로 글을 읽음에 사략(史略)을 먼저 배웠는데 처음에 한권을 읽고 능히 그 다음 책의 일들을 알아서 말하고 둘째권을 읽을때 또한 능히 셋째권의 일을 말하니 어른들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본래 네가 배우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아느냐?"고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처음보면 반은 해독하지 못한 것을 여러번 익힌 즉 스스로 해독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오직 문학에 영리함이 타인에 솟을 뿐만아니라 생각함이 깊고 말과 웃음이 적으며 겸양하여 외물을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13세에 행동이 엄연하고 성인같은 덕기가 밖으로 나타나고 총명이 안에 쌓여 그 독서하기를 좋아하는것은 대개 선생의 천성이었다. 또 항상 언행에 있어 그 스스로 부족한 것과 스스로 속이는 일이 있는가를 살피며 날로 반드시 기록함이 있어 그 부족함이 있은 즉 동그라미를 치고 마음으로 속이는 일이 있으면 획을 그으며 스스로 반성하나 그래도 부족함과 속임이 반이나 된다고 하였다.

1665년(현종 6년) 봄에 아버지의 명령으로 정관재 이단상(靜觀齎 李端相 1628~1669)의 문정(門庭)에 나아가니 이공이 여러번 스승의 자리를 겸양했다 하며 이해에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겨울에 문충공 조한영(文忠公組漢英 1608~1670)의 집에 장가들었는데 조공이 선생이 쓴 글을보고 크게 놀래어 탄식해 말하기를
"자네의 포부를 보니 시(詩)를 할 사람이 아니라"했다.또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 1632∼1695)를 만나보니현석이 다른사람에 말하기를 "임군의 박문강기(博問强記)는 내 도저히 미칠바 못된다."고 칭찬했다 한다.

1670년 (현종 11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부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등을 지내고 이후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 등 많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다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경사(經史)에 정통(精通)하고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동춘송준길 (同春 宋浚吉 1606~1672)에게도 수학한 기호학파의 학자였으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율곡(栗谷)의 이론을 종합한 대학자로 퇴율이후 의 거유(巨儒)로 꼽힌다.

1680년 (숙종 6년) 경신 이후에 산림파와 훈구파들 사이에서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 1654~1689)등 동지들과 한결같이 청의 (請議)를 확장하여 기사의 화 (己巳之禍)에도 말려들지 않았다. 당시의 재상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좌상 박세채등이 반드시 선생과 같이 나라일을 하고자하여 서울에 머무르도록 만류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숙종께서 들으시고 중사를 보내어 병을 보도록 하고 땔감을 보내어 극히
사랑하는뜻을 표하며 개성유수(開城留守), 공조참판(工曹參判)의 자리를 내리었다

1696년(숙종 22년)에 48세의 나이로 태묘방(太廟坊)에서 별세하니 묘(墓)는 나주 동편 40리 금정면에 서당이덕수 (西堂 李德壽)가 지은 신도비명 (神道碑銘)과 함께 있고, 현재 나주의 창계서원(滄溪書院)과 함평(咸平)의 수산사 (水山祠)에 제향(祭享) 되어 있으며 저서로 창계집(滄溪集) 14권이 전한다. 지금 정천면 조림리에 이문정이라는 정자나무가 있는데 이 정자 자리는 본래 창계선생께서 살았던 옛집터이 대문으로표시 되었던 것인데 창계 선생이 심은 나무는 약 40~50년전에 없어지고 지금 서있는 이문정 정자나무는 후손의 손에 의해 심고 길러진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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