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명소

진안의 관광명소는 다른 명소와는 다른 매력이 곳곳이 숨어있습니다
진안만의 특별한 명소를 소개합니다

진안만의 특별한전통/문화

스토리텔링
고향을 빛낸 인물

::전통/문화::스토리텔링 ::고향을 빛낸 인물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304 3.1운동 앞장선 김영필(金永弼) 관리자 07/13 11:03:14 456

호는 달중(達中)이오 본관이 광산(光山)인 선생은 1896년 (건양 1년) 3월 16일 주지내가 화산봉에서 떨어져 나온 와룡암을 휘감아 도는 의인의 고장 주천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학문이 높은 김대현(金大鉉),김태현(金泰鉉)두 분의 문하에 들어가 총명하고 뛰어난 재능으로 수학하니 그의 나이 6살때 이었다.
그때 주천에서는 나라 잃은 통한을 달래고 나라를 다시 찾는 길은 교육의 힘 밖에 없다하여 화동(華東- 현재 주천초등학교)학교가 세워지게 되어 그의 나이 12살에는 여기에서 수학을 한 뒤 그곳의 선생이 되어 후배를 교육하기도 하였다.
한학과 신학문에걸쳐 깨달음을 얻게된 선생은 한일합방의 비통함을 달래면서 후학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면서 개화 운동에도 앞장 서게 되었다. 먼저 뜻을 같이하는 향리 인사와 합의하여 단발령을 내리고 신문물을 교육하기에 정성을 쏟았다.

1919년 3월 2일 대한독립만세 운동이 밀물같이 전국에 퍼지자 의혈 청년이었던 선생은 대한민보,독립 신문과 독립선언문을 무주, 진안, 장수 일원에 뿌리면서 3.1 만세 운동을 지휘하였다.

만세 운동이 일어난지 한달이 지난 4월 3일, 갓 20의 나이였던 선생은 주천면 유지 김주한과 학생 양해관과 뜻을 모아 새벽 4시께 학생과 주민 2백여명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 그러나 곧 들이닥친 일경에 의해 대열은 일단 해산됐으나 밤 10시께 60여명이 마을앞 논에 다시 모여 횃불을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함성과 불길은 이웃 마을로 퍼져 곳곳에서 호응의 물결이 꼬리를 이었다. 운일암 반일암의 앞 뒷산 영봉의 신령들로 시위를 고무하듯 밤 하늘을 지키고 있었다.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대한민보, 독립신문 그리고 독립선언서 등을 입수하여 각 지역의 지도급 인사들에게 배포하였다. 군내는 물론 장수와 무주에까지 이 문서들은 전달되었다. 때로는 면사무소에 있는 등사기를 훔쳐 문서를 등사하였고 주재소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백리길을 멀다 않고 뜻있는 인사들을 찾아 다니며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다. 

풍운의 뜻을 품고 일본에 까지 잠입하여 한국 유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던 선생은 끝내 1920년 정초 일경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됐다. 일경은 그의 코에 고춧물을 붓고 주리를 틀었으며 뭇매를 때렸다.그의 증인 심문에서 주천면 서기 김규현이 나왔다. 그는 "빼앗겼던 나라를 다시 찾으려는 것이 무슨 죄냐"고 따지면서 일경 서부광재, 소택목지조등을 난타하여 중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그는 결국 대구복심법원에서 4년간의 복역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옥고에서 풀리자 그는 다시 뜻을 세우고 영어, 일어, 주산등을 독학하여 능통하였으니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염원은 꺼지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자 그의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날로 혼란해 가는 정국을 개탄하면서도 올바른 정치사상인 민주주의를 주입하여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운동을 펴왔으니 민족의 나아갈 길을 언제나 뚜렷이 제시하고 몸소 실천하며, 선도적 역할을 다한 것이다.

1950년 6.25가 터지자 그는 북괴군에게 납치되어 죽음 직전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피신해 있으면서 공비로 부터 향토를 수호하도록 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1975년 2월 10일 79살에 대구 형무소에서 부터 발병한 동상이 도져 활동을 할수 없게 되어 고생하다가 세상을 뜨니 1977년 12월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과 함께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진안군청 QR코드 https://tour.jinan.go.kr